추억을 어루만지는 시간…책방, 마음의 안식처 되다

[이동미 작가의 베를리너로 살기] 베를린 서점 4곳 투어

베를린을 대표하는 서점인 두스만 서점 내부. 4층까지 이어진 검은 기둥과 빨간색의 천장이 이 서점만의 특별한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베를린 하드 록다운(봉쇄·집에만 머무는 것) 두 달째. 집 앞 산책과 슈퍼마켓 갈 때를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춥기도 하거니와 밖에 나가도 걷는 것 외엔 할 게 없다. 만날 수 있는 사람도 한 가구에 한 명으로 더 제한됐다. 이전에는 한 가구에 한해 총 다섯 명까지 모일 수 있었다. 써야 하는 마스크 규정도 바뀌었다. 바이에른주는 차단율 94%의 고성능 의료 마스크 FFP2 착용을 의무화했다. 베를린에서도 이제 의료용 마스크를 써야 한다. 대중교통에서 천 마스크는 더이상 쓰면 안 된다. 독일의 하드 록다운은 2월 중순까지 연장됐다.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베를린시는 재택근무도 필수 사항으로 고려하고 있다. 지금도 최대한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이긴 하다. 베를린이니까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럭저럭 잘 버텨 왔던 하드 록다운이 연장되면서 더욱 힘이 빠진다. 베를린에서 살기 시작한 지난 1년은 그래도 이방인의 시선으로, 때로는 트램만 타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요즘은 자주 무기력하다. 온다는 눈도 매번 비가 돼 내리니 기분이 땅 밑까지 파고든다. 그럴 때면 마지막 보루처럼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서점이다. 생필품 파는 곳만 문을 여는 록다운 상황에서도 서점만은 예외였다. 독일인에게 책은 빵처럼 생필품인 걸까? 어쩌면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위한 생필품’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베를린만 그런 건 아니다. 영국 런던도, 프랑스 파리도 서점은 문을 연다고 들었다.

파격적인 비주얼과 색다른 시선이 가득한 세계의 아트북과 건축, 사진집을 들춰 보며 시간을 보낸다. 한껏 쪼그라든 상상력과 영감, 욕망의 불씨를 되살리며 베를린의 로컬 서점을 기웃거린다. 이번엔 베를린에서 내로라하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서점 네 곳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두스만 서점 창가에 놓인 소파는 안락한 탐독 시간을 제공한다.
●록다운 우울함을 잊을 수 있는 ‘두스만 서점’

‘두스만 다스 쿨투어카우프하우스’(Dussmann das KulturKaufhaus)는 베를린에서 가장 큰 서점 중 하나다. 서울의 교보문고 같은 곳이다. 지하 1층을 포함해 총 5층에 걸친 서점 내부에 분야별 서적을 비롯해 음반 CD와 LP, 영화 DVD, 오디오북, 디자인 소품 코너까지 다양하게 자리해 있다. 번화한 프리드리히스트라세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를 찾아가면 그곳에 두스만 다스 쿨투어카우프하우스 매장이 있다. 메인 입구 앞에서 종종 거리 음악가들의 악기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적막한 거리일 뿐이다.

서점에 들어가면 피라미드 모양의 유리 지붕이 있는 중앙 홀이 먼저 펼쳐진다. 중정처럼 가운데가 4층까지 뚫려 있어 채광이 0층(우리나라의 1층)까지 내려온다. 중앙 홀 왼편으로는 베를린 도시에 관한 온갖 책이 다 모여 있다. 베를린 여행 가이드북부터 도시에 관한 역사, 문화, 각종 지도까지 진열돼 있다. 베를린에 여행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들르던 코너였다.
두스만 서점의 베를린 도시 코너. 한 도시의 시대별 역사와 문화를 보여 주는 다양한 책들이 진열돼 있다.
이번엔 중앙 홀을 가로질러 다이어리가 모여 있는 코너로 직진했다. 새해를 위한 몰스킨 다이어리를 하나 샀다. 매일매일 무얼 써넣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지만, 소소한 하루하루의 산책과 생각거리, 그날 본 영화나 책의 이름을 적었다. 다이어리 코너 문 바깥 편으로는 ‘스핑크스’가 전시돼 있다.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서 영구 임대한 핫셉수트 여왕의 진짜 스핑크스를 서점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두스만에서 즐겨 가는 코너는 ‘잉글리시 북 숍’이다. 서점 안의 서점처럼 영어 책들만 별도로 모아둔 공간이다. 세계 유명 소설가와 정치인들의 책은 물론 인간의 심리, 관계, 사랑에 관한 다양한 에세이와 시집 코너에 자주 들른다. 두스만 서점이 좋은 이유는 군데군데 앉을 수 있는 자리와 소파가 잘 마련돼 있다는 점이다. 섹션마다 코너 자리를 이용하거나 창문 가까이에 안락한 자리를 만들어 놨다. 한번 앉으면 좀처럼 엉덩이를 떼기 어렵다. 이 안락하고 근사한 소파 자리도 지금은 모두 책 전시대로 쓰인다. 서점 안에서 앉는 건 금지이기 때문이다. 록다운이 풀리면, 동그란 창문이 있는 소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마음껏 책을 뒤적거리고 싶다. 서점이 문을 닫는 밤 9시까지.
아치형 천장으로 유명한 뷔허보겐 서점은 철로를 따라 길게 뻗은 다섯 개 공간으로 구성됐다.
●철로 아래 자리한 둥근 천장 ‘뷔허보겐’

베를린에 와서 처음 가 본 서점이 ‘뷔허보겐’(Bcherbogen)이다. 2007년도에 알았으니 벌써 14년 전이다. 서점이 생긴 건 1980년. 4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서점을 잊을 수 없는 건, 위치 때문이다. 철로 아래에 있어 “이런 데에 서점이 있네?”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안에서 책을 보고 있으면 서점 위 철로로 지나가는 S반의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진동이 배경음악처럼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
기차역 아래에 자리한 뷔허보겐 서점.
뷔허보겐 서점이 있는 정거장은 사비니플라츠역이다. 부티크 호텔과 맛집들이 숨어 있는 서베를린의 번화가 중 하나다. 역 철로를 따라 길게 만들어진 서점은 다섯 개 공간이 아치형 작은 통로로 이어져 있는데, 마치 다른 시간과 시간 사이를 건너는 것처럼 색다른 기분이 든다. 벽돌로 된 오래된 벽의 실내도 운치를 더하고 반원 모양의 둥근 천장과 조명도 인상적이다. ‘뷔허보겐’이란 이름도 책들을 뜻하는 뷔허(Bcher)와 둥근 천장 즉, 아치를 뜻하는 보겐(bogen)을 합친 것이다.

이곳은 아트와 건축, 디자인 등의 전문서적을 다루는 서점 중 베를린에서 거의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지금은 ‘두 유 리드 미’나 ‘프로 큐엠’ 같은 작은 서점이 더 트렌디한 곳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이곳의 내공을 무시할 순 없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카를 라거펠트와 베를린 태생의 예술가 이자 겐츠켄 등이 단골로 와서 책을 사던 곳이니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희귀한 명품집과 고가의 사진집도 잡지처럼 서가에 평범하게 꽂혀 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이곳에 오면 기차 소리와 함께 늘 베를린의 첫 추억이 딸려 온다. 한번 들어가면 두세 시간은 훌쩍 도둑맞고 나오는 곳이다.
‘작고 콧대 높은’ 서점 ‘두 유 리드 미’는 가장 흥미롭고 진취적인 잡지들을 소개한다. 한국 여행객들도 즐겨 찾는다.
‘두 유 리드 미’(Do you read me?!) 서점을 처음 알게 된 건 2014년이었다. 유명 카드 회사의 프로젝트로 베를린 취재를 왔었고, 꼭 가 봐야 할 열 개의 숍 중 하나로 이곳을 소개했다. 미테의 작은 서점이지만, 큐레이션이 좋아 당시 베를리너들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지금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미테의 명소가 됐다.

베를린을 찾는 한국의 여행자들에게도 필수 코스로 꼽힌다. 한국의 많은 매체에서 이 서점을 소개하기도 했고, 블로그에도 많이 나오며, 한국 연예인들도 다녀가 더 유명해졌다. 특히 한 여자 연예인이 어떤 프로그램에서 이 서점의 에코백을 메고 나온 후 인터넷에서 ‘공구’를 할 정도로 큰 인기였다. 검은 바탕에 서점의 이름이 깔끔하게 박힌 에코백이 베를린 여행의 필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증 아이템이 된 것이다. 서점에서도 이 에코백이 유독 한국인들에게 인기인 걸 알고 한국인처럼 보이면 알아서 먼저 보여 줬다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서점은 사실 그렇게까지 친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관심에 가깝다. 뭔가를 물어보지 않는 이상, 손님이 뭘 보든 뭘 찾든 신경을 거의 안 쓴다. 사실은 그래서 대놓고 책 보기 좋은 곳이다. 얼마 동안 머물든 상관을 안 하니까. 눈치를 안 봐도 되니까.

두 유 리드 미는 미테 한복판에 있지만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낡은 나무 간판에는 ‘?!’ 표시만 새겨져 있어 간판을 보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작은 내부 안에는 전 세계의 평판 좋은 최신 잡지와 아티스트들의 컬렉션, 디자인, 사진, 건축, 문학에 관한 전문 서적들이 가득하다.

이 작고 콧대 높은 서점에서 나는 유명 작가의 사진집과 잡지를 많이 봤다. 너무 비싸서 사기 부담스러운 책들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비닐로 싸 놓은 책이 거의 없으므로), 노골적이고 혁신적인 이미지들에서 영감도 많이 얻는다. 또 베를린에 올 때마다 이곳에서 베를리너들이 추천하는 장소를 소개해 놓은 단행본을 꼬박꼬박 샀다. 계절마다 한 권씩 나오는데, 책에 소개된 장소들을 보면서 새로운 베를린 탐험을 하기 좋았다. 작은 책 속에는 짧은 설명이긴 하지만 요약이 잘 돼 있고, 직업별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곳들도 엿볼 수 있었다. 미테를 정처 없이 걷다가도 가장 만만하게 숨어들기 좋은 서점이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서점들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두스만 지하에도 카페가 있지만 좀더 분리된 느낌이라 이곳이 좀더 서점 안 카페 같은 느낌이 든다.)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곳. 물론 지금은 록다운 때문에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은 모두 치운 상태다. 커피도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
오셀롯 서점의 아이콘인 오셀롯 고양이가 그려진 간판.
미테의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브루난스트라세에 자리한 오셀롯(Ocelot)은 규모가 꽤 크고 정리도 잘 돼 있다. 네모 반듯한 구조가 아니라 약간 사선의 비정형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넓은 복도를 따라가는 느낌으로 책을 구경할 수 있다. 책은 분야별로 구획이 잘 나누어져 있어 찾기 쉽다. 다만 영어로 된 섹션 비중이 크지는 않아서, 독일어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선택에 한계가 있다. 그래도 비주얼 강한 예술 전문 서적과 패션 잡지가 많아서 곳곳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읽을 수 있다.(이곳도 책으로 진열해 두어서 지금은 앉을 수 없다.)
오셀롯 서적의 띠지엔 직원의 손글씨 추천서가 적혀 있다.
‘오셀롯’이란 이름은 원래 고양잇과에 속하는 동물 이름이다. 표범 같은 갈색 점무늬가 특징이다. 오셀롯은 살바도르 달리가 평생 키운 반려동물로도 유명하다. 달리는 모든 모임에 오셀롯 ‘바부’를 데리고 다닐 만큼 아꼈으며, ‘살아있는 옵 아트’(추상적 무늬와 색상을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실제로 화면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미술)라 부르며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커피 카운터가 있는 벽 위에 일러스트로 그린 오셀롯이 있으며 오셀롯이 그려진 포스터와 에코백, 머그컵 등의 자체 상품도 판매한다. 서점으로서 오셀롯만의 특징이라면 자체적으로 추천하는 책에 직접 손 글씨로 쓴 띠지를 둘러놓는다는 점이다. 한국에도 직접 쓴 추천 띠지를 책에 두르거나 메모를 붙여 놓는 독립서점이 몇 군데 있다. 오셀롯도 띠지에 추천 책들에 대한 감상이나 이유 등을 적어 두었는데 그 이유들이 꽤 시적이다.

예를 들면 “이 책을 읽는 건 덜 아문 상처의 딱지를 떼어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와 같은 구절. 딱지를 떼어낼 때 느껴지는 특유의 쾌감이 있으면서도 덜 아문 상처로 인한 쓰라림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책이라니…. 베를린 시인인 순예 레베요한의 시집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시를 읽고 싶게끔 만드는 추천사가 아닌가. 직원들의 이름 아래 아름답고 시적인 추천사가 적혀 있는 곳, 오셀롯에 있으면 독일어를 열렬하게 배우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이동미 여행작가 dongmi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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