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천사’의 기부금… 상처입은 ‘시민’의 자긍심
임송학 기자
입력 2019 12 30 22:58
수정 2019 12 31 01:37
20년 이어 온 전주 얼굴없는 천사 성금
유튜브서 보고 3일간 잠복했다 훔쳐4시간 만에 30대 검거… 6000만원 회수
주민들 “수사중 천사 신분 노출 걱정”
해마다 세밑 추위를 녹여 주던 전북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을 도난당하는 황당한 사건이 경찰의 발 빠른 수사로 사건 발생 4시간여 만에 막을 내렸다.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는 해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전후해 올해로 20년째 성금을 전달해 왔는데 이 같은 사건이 발생, 전주시민들에게 충격과 허탈감을 줬다.
전주시는 30일 오전 10시 3분 노송동주민센터 뒤 천사공원에 전달된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이 도난당해 경찰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인근 폐쇄회로(CC)TV에 찍힌 용의자를 추적해 이날 오후 2시 40분쯤 충남 논산과 계룡 인근에서 30대 남성 2명을 긴급체포했다. 경찰은 이들이 가지고 있던 성금 6000만원을 회수했다. 전주완산경찰서 관계자는 “용의자들이 소지한 현금이 성금 전액인지는 현재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범인들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얼굴 없는 천사가 거액의 현금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워 범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범인들이 지난 26~27일과 사건 당일 주민센터 인근에 번호판을 가린 흰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세워 놓고 잠복했던 사실이 경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컴퓨터 가게를 운영하는 피의자 중 1명이 유튜브를 보고 직업이 없는 다른 1명에게 범행을 제안한 것 같다”고 밝혔다.
이날도 5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얼굴 없는 천사는 여느 때처럼 “주민센터 뒤 천사공원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성금을 두고 간다”고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얼굴 없는 천사임을 직감한 주민센터 직원 3명은 곧바로 천사공원으로 달려갔다. 주민센터 바로 뒤에 조성된 천사공원은 어른 걸음으로 1분 이내 거리다. 그러나 공원에는 성금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직원들이 공원 구석구석을 40분여 뒤졌으나 성금을 찾을 수 없었다. 얼굴 없는 천사는 흰색 A4용지 상자에 현금을 넣어 전달하기 때문에 눈에 띄기 쉽다. 얼굴 없는 천사는 멀리서 지켜보다 3번이나 “잘 찾아보라”고 전화했지만 없어진 성금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전주시는 오전 10시 40분쯤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남몰래 선행을 베풀어 전주시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존재다. 지난해까지 19년 동안 20차례 전달한 성금이 6억 834만 560원에 이르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신비로운 존재로 알려졌다.
시민 최금희(61)씨는 “전주시민들의 자존심에 훔쳐 간 성금보다 수천배 많은 상처를 줬다. 수사 과정에서 얼굴 없는 천사의 신분이 드러날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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